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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는 제정 사랜드 문서 참고.

전사랜드의 차르이자 전제자
Царь и Самодржацъ свесаландскій
존속 기간
711년 ~ 1917년 3월 16일
초대
마지막
인원
46명
경칭
차르 폐하
(Ваше Царско Величанство)
관저
그리핀 궁 (인터그라드)
대관 장소
성모안식 대성당 (인크론슈타트)
계승
세습 (1797년 제위계승법)

1. 개요2. 칭호3. 권한4. 제위 계승5. 대관식6. 궁정과 관저7. 차르와 정교회8. 역대 차르
8.1. 인크론슈타트 왕조 (711~1259)8.2. 즐라토미로비치 왕조 (1291~1597)8.3. 스베토자레비치 왕조 (1611~1762)8.4. 벨로슬라비치 왕조 (1762~1917)
9. 평가10. 여담

1. 개요 [편집]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름), 전사랜드의 차르이자 전제자, 인크론슈타트와 인터그라드의 차르, 평원과 물길의 주인, 고원의 군주, 카스탄 산지의 보호자, 롱 강 서안과 남부 해안의 영주, 사무탁의 상속자, 그리고 기타 여러 땅의 군주.

1784년 이후 차르의 공식 칭호

제정 사랜드의 군주. 공식 칭호는 전사랜드의 차르이자 전제자(Царь и Самодржацъ свесаландскій)로, 줄여서 차르(Цар)라 불렀다. 711년 인크론슈타트 공작 인터르스키 1세가 평원을 통일하고 고대 사랜드 제국의 계승을 내세워 처음 칭했으며, 1917년 3월 16일 장미 혁명으로 라자르 2세가 퇴위할 때까지 네 왕조의 46명이 이 자리에 올랐다.

차르는 1907년까지 입법·행정·사법의 최종 권한을 홀로 쥔 전제군주였고, 정교 신앙의 수호자로서 사랜드 정교회를 통제했다. 그러나 1,206년 동안 차르의 실제 권력은 대귀족과의 관계에 따라 크게 오르내렸다. 중세의 차르는 귀족 회의 사보르의 동의 없이 큰일을 벌이기 어려웠고, 차르가 진정한 전제자가 된 것은 1652년 대법전 이후였다.

2. 칭호 [편집]

'차르'는 사랜드어로 군주를 뜻하는 말로, 고대 사랜드 제국의 군주 칭호를 슬라브식으로 옮긴 것이라는 것이 제정의 공식 설명이었다. 인터르스키 1세는 단순한 공작이나 왕이 아니라 고대 제국의 계승자임을 내세우기 위해 이 칭호를 택했고, 이후 모든 차르는 자신을 고대 제국 군주의 후계자로 여겼다.

긴 공식 칭호는 시대에 따라 덧붙여졌다. 1661년 천도 뒤 '인크론슈타트와 인터그라드의 차르'가 되었고, 1784년 고원 병합 뒤 '고원의 군주'가 들어갔다. 칭호의 각 구절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 평원과 물길의 주인: 712년 인터르스키 1세의 수문법이 평원의 모든 수문과 수로가 차르에게 속한다고 선언한 데서 나왔다. 영주들의 수리권은 형식상 모두 차르가 봉토로 내려 준 것이었다.
  • 카스탄 산지의 보호자: 농노제를 겪지 않은 카스탄 산지 자유민에 대해 차르는 '지배자'가 아니라 '보호자'를 자처했다. 산지 자유민이 차르에게 직접 병역을 바치는 관계를 나타낸다.
  • 롱 강 서안과 남부 해안의 영주: 1627년 롱 강 강화로 동부 저지대의 대부분을 잃은 뒤, 남은 롱 강 서안에 대한 지배를 확인하는 구절이다.
  • 사무탁의 상속자: 1089년 사무탁 협정으로 빌베른에 넘겨준 사무탁호 일대에 대한 권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땅을 되찾으려 한 차르는 없었다.

3. 권한 [편집]

차르는 법률의 제정과 폐지, 관리의 임면, 전쟁과 강화, 조약 체결, 사면, 화폐 발행의 권한을 모두 가졌다. 1763년 이후 통치평의회가 법률안을 심의했지만 그것은 차르에게 의견을 올리는 일이었을 뿐, 차르의 결정을 막을 권한은 없었다. 다만 통치평의회의 대귀족들이 반대하는 칙령을 차르가 끝까지 밀어붙인 일은 드물었다. 1867년 페타르 3세가 농노 해방 칙령안을 통치평의회의 부결 뒤 철회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차르의 권한에는 분명한 경계가 하나 있었다. 1652년 대법전은 영지 안의 농노에 대한 재판·경찰·징세권을 영주에게 보장했고, 차르는 이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귀족과 차르 사이의 오랜 약속이었다. 그래서 제정의 전제정은 '영지 밖의 전제정'이라 불리기도 했다.

1907년 《국가기본법》 이후 법률은 사보르 양원의 의결을 거쳐야 했으나, 차르는 사보르를 언제든 해산할 수 있었고 사보르가 열리지 않는 동안에는 칙령으로 법률을 대신할 수 있었다. 외교·군사·궁정에 관한 권한은 끝까지 차르에게만 있었다.

4. 제위 계승 [편집]

중세의 제위는 원칙적으로 차르의 아들에게 이어졌지만, 새 차르는 사보르의 승인을 받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 관습은 1611년 혼란기를 끝내며 사보르가 보그단 1세를 직접 추대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1652년 이후 사보르가 소집되지 않으면서 승인 관습도 사라졌고, 18세기에는 차르가 후계자를 지명하는 일이 잦았다.

1762년 궁정 정변으로 여제 옐레나 1세가 남편을 폐위하고 즉위한 뒤, 그 아들 알렉산다르 1세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97년 제위계승법을 반포했다. 이 법은 제위를 남계 장자에게 우선 잇게 하고, 남계가 모두 끊긴 경우에만 여계에게 넘기도록 했다. 이후 1917년까지 제위는 이 법에 따라 이어졌다.

5. 대관식 [편집]

차르의 대관식은 1172년 완공된 인크론슈타트의 성모안식 대성당에서 열렸다. 1661년 수도를 인터그라드로 옮긴 뒤에도 대관식만은 옛 수도에서 여는 전통이 1894년 라자르 2세의 대관식까지 이어졌다.

대관식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대성당 안에서는 총대주교가 새 차르에게 성유를 바르고 차르관을 씌웠으며, 새 차르는 오른손에 그리핀 홀을, 왼손에 금으로 된 수문 열쇠를 받았다. 이어 차르는 대성당을 나와 대성당 앞을 흐르는 고대 수로로 가서, 수문 열쇠로 수문을 손수 열었다. 수문이 열리고 물이 수로를 따라 흘러가면 군중이 환호했는데, 이것이 '수문 의식'이다. 평원의 물길을 다스리는 자가 곧 평원의 주인이라는, 고대 제국과 분수 전쟁 이래의 관념을 의례로 만든 것이다.

수문 의식에는 여러 일화가 전한다. 1291년 몽골에게서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은 스테판 1세는 몽골군이 부순 수문 대신 맨손으로 흙둑을 허물어 물을 흘려보냈다고 하고, 1894년 라자르 2세의 대관식 때는 수문이 녹슬어 열리지 않아 기술자들이 밤새 기름을 먹였다고 한다.

6. 궁정과 관저 [편집]

차르의 공식 관저는 인터그라드의 그리핀 궁이었다. 1661년 천도와 함께 짓기 시작해 18세기 내내 증축된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정문 위의 거대한 금색 그리핀 조각에서 이름을 땄다. 여름에는 인터그라드 남쪽 베레스 강변의 여름 궁전으로 옮겨 갔고, 인크론슈타트의 옛 궁은 대관식 때만 쓰였다.

궁정은 1724년 관등령에 따른 궁정관들이 꾸려 나갔다. 궁내부가 궁정의 재정과 차르 직영지를 관리했는데, 차르 직영지는 평원 전역의 국가 농노 수백만 명이 딸린 제정 최대의 영지였다. 18세기 후반부터 궁정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으며, 19세기 미하일로 2세 이후에는 민족주의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궁정에서 사랜드어를 쓰는 것이 다시 장려되었다.

7. 차르와 정교회 [편집]

차르는 정교 신앙의 수호자였고, 정교회 신자만이 차르가 될 수 있었다. 차르는 사랜드 정교회의 총대주교를 임명했으며, 1652년 대법전 이후에는 교회의 최고 의결 기관인 성무원에 세속 감독관을 두어 교회를 통제했다. 러시아와 달리 사랜드는 총대주교직을 폐지하지 않았는데, 총대주교가 대관식에서 차르에게 성유를 바르는 역할이 차르의 정통성에 없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8. 역대 차르 [편집]

8.1. 인크론슈타트 왕조 (711~1259) [편집]

대
이름
재위
비고
1
711~742
건국
2
인터르스키 2세
742~779
동방 원정
3
블라디슬라프 1세
779~801
사무탁호 패전
4
라도슬라프 1세
801~826
5
인터르스키 3세
826~858
6
블라디슬라프 2세
858~884
7
페타르 1세
884~911
8
보리슬라프 1세
911~940
9
라도슬라프 2세
940~963
10
미하일로 1세
963~997
미하일로 법전
11
토미슬라프 1세
997~1024
12
블라디슬라프 3세
1024~1051
13
즈데슬라프 1세
1051~1077
14
라자르 1세
1077~1105
사무탁 협정
15
인터르스키 4세
1105~1132
16
보리슬라프 2세
1132~1160
17
두샨 1세
1160~1189
성모안식 대성당
18
토미슬라프 2세
1189~1214
19
두샨 2세
1214~1238
20
브라니슬라프 1세
1238~1251
21
블라디슬라프 4세
1251~1259
몽골군에 전사

1259년부터 1291년까지는 몽골 점령기로 차르가 없었다.

8.2. 즐라토미로비치 왕조 (1291~1597) [편집]

대
이름
재위
비고
22
1291~1316
인크론슈타트 수복
23
스테판 2세
1316~1337
24
우로시 1세
1337~1355
총대주교좌 승격
25
드라구틴 1세
1355~1378
수문 닫는 날 규정
26
스테판 3세
1378~1402
27
바실리예 1세
1402~1431
28
우로시 2세
1431~1458
29
페타르 2세
1458~1480
30
마르코 1세
1480~1503
총병대 창설
31
스테판 4세
1503~1531
32
바실리예 2세
1531~1559
33
드라구틴 2세
1559~1578
34
우로시 3세
1578~1597
후사 단절

1597년부터 1611년까지는 혼란기로, 정통 차르가 없었다. 이 기간에 섭정 밀로시 브라니코비치(1597~1604)가 권력을 쥐었고, 1591년 죽은 황태자 드미트리를 자칭한 '가짜 드미트리'(1606~1607)를 비롯한 세 명의 참칭자가 차르를 칭했다. 이들은 역대 차르의 대수에 넣지 않는다.

8.3. 스베토자레비치 왕조 (1611~1762) [편집]

대
이름
재위
비고
35
1611~1639
사보르 추대
36
밀로시 1세
1639~1671
대법전·천도
37
보그단 2세
1671~1689
고원선
38
니콜라 1세
1689~1725
관등령
39
밀로시 2세
1725~1741
40
니콜라 2세
1741~1762
정변으로 폐위

8.4. 벨로슬라비치 왕조 (1762~1917) [편집]

대
이름
재위
비고
41
1762~1796
고원 병합
42
알렉산다르 1세
1796~1825
제위계승법
43
미하일로 2세
1825~1855
44
1855~1881
암살
45
니콜라 3세
1881~1894
46
1894~1917
마지막 차르

9. 평가 [편집]

제정의 공식 역사에서 차르는 고대 제국의 계승자이자 평원의 아버지였다. 반면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에서 차르는 영주 계급의 우두머리로, 농노제를 지킨 최종 책임자였다. 1990년대 이후의 연구는 차르를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한 전제자로 보기보다, 영지 안의 권력을 귀족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영지 밖의 권력을 얻은 거래의 한쪽 당사자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페타르 3세의 해방 칙령안이 통치평의회 앞에서 철회된 일은, 전제자로 불린 차르조차 그 거래를 깰 수 없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자주 인용된다.

10. 여담 [편집]

  • 46명의 차르 가운데 여성은 옐레나 1세 한 명뿐이다.
  • 가장 오래 재위한 차르는 37년을 다스린 인터르스키 2세(742~779)이고, 가장 짧게 재위한 차르는 8년을 다스린 블라디슬라프 4세(1251~1259)다.
  • 수문 의식에 쓰인 금 수문 열쇠는 1917년 장미 혁명 뒤 임시정부가 국고로 거두어들였고, 지금은 크라슬리스크의 국립 역사 박물관에 있다.